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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맥이 끊겼던 발레 “한국의 신부(新婦)”(Die Braut von Korea)의 재개

by jek 2021. 4. 15.

김지은

1897년 5월 22일, 오스트리아 비엔나 K. K. 궁정 오페라극장에서 발레 “한국의 신부”가 초연되었다. 120여년 전 한국을 주제로 한 비엔나 발레, 놀랍지 않은가? 이 발레는 당시 음악, 연출, 안무 등 모든 분야에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1901년 5월, 38번째 공연을 마지막으로 “한국의 신부”는 비엔나 궁정 오페라 극장의 발레 공연목록에서 돌연 사라졌다. 그 후 2012년에 재독 한국학자 박희석 박사의 노력으로 로버트 리나우 (Robert Lienau) 문서고에서 육필총보(수기로 작성된 오케스트라 악보)가 재발견 되었다. 2021년 필립 크뤨(Philipp Kröll)의 편집으로 쇼트(Schott) 출판사에서 현대판 총보와 피아노 판이 출판된다. 이것은 한 세기동안 잊혔던 발레 “한국의 신부”가 온전한 공연으로 복원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19세기 말 한국은 비엔나의 발레에서 어떻게 표현됐을까? 그리고 이 발레는 왜 그렇게 갑자기 무대에서 사라졌을까?

편성과 줄거리

발레 “한국의 신부”는 4막 9장 구성으로, 대규모 오케스트라가 편성되었다. 음악은 당시 비엔나 궁정오페라 발레 단장이자 궁정악장(Kapellmeister)이었던 요제프 바이어(Josef Bayer)가 작곡했다. 바이어는 극작가 하인리히 레겔(Heinrich Regel)과 무용단장이자 안무가였던 요제프 하쓰라이터(Josef Haßreiter)와 함께 “한국의 신부”를 포함한 여러 발레들을 제작했다. 비엔나 극장 공연기록보관소에 따르면 초연 당시 30명 이상의 무용수가 출연했다.(1) 바이어의 육필총보는 500쪽이 넘으며 공연시간은 약 2시간이었다. 

이 발레는 한국왕자와 그의 신부 다이샤의 사랑이야기로, 제1차 중일전쟁(1894/1895)을 배경으로 한다. 즉, 실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허구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1895년 베를린 음악출판사 중 하나였던 슐레징어(Schlesinger)에서 발레의 대본이 먼저 출판되었다. 이를 미루어보아 레겔은 언론을 통해 한국에서 일어나는 전쟁 소식을 접하면서, 동시에 대본을 썼다고 짐작할 수 있다. 레겔은 한국을 방문했던 적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여자 주인공 다이샤는 사랑하는 왕자를 좇아 소년선원 옷으로 변장하고 전쟁에 따라 나선다. 그녀는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힌 왕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일본장교와 군인들의 괴롭힘도 견딘다. 그들은 여러 가지 위기에 직면하지만 이겨낸다. 결국 이 둘은 서울에 있는 한국왕자의 정원으로 돌아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며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발레의 특징

먼저 레겔과 바이어가 그들 입장에서 ‘낯선 나라 한국’을 주제로, 그것도 ‘최근 사건’을 자신들의 관점으로 다뤘다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1890년대 발레 작품에서 이러한 시도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극작가, 작곡, 감독, 무용가 모두가 많은 상상력과 노력, 연구가 필요했으리라 생각된다. 발레 “한국의 신부”를 통해 비엔나 관객들은 동아시아 지역의 “로맨틱한 이야기와 현시대의 실제 모습”을 경험할 수 있었다.(2)

둘째로 여주인공 다이샤의 긍정적이고 자기주도적인 태도가 눈에 띈다. 그녀는 연인(왕자)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수동적인 여성이 아니다. 다이샤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아끼지 않으며, 함께 전쟁에 나설 용기도 있다. 그녀는 일본 진영에서 일본 옷을 입고 일본 장교와 군인들을 상대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포로로 잡힌 왕자를 구하기 위한 다이샤의 신중한 태도이다.

마지막으로 이 발레는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볼 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발레에는 중국 춤, 옛 일본 전쟁 춤, 시암(태국의 옛 이름) 춤, 자바 춤과 같이 소제목에 국가이름이 언급된 개별무용이 등장한다. ‘한국 춤’이라는 이름을 가진 춤은 없지만, 극중 배경을 미루어보아 제4막 ‘서울, 한국왕자의 차 정원’에서 공연되는 부채춤은 한국의 춤이라고 추측된다. 여러 나라, 먼 나라의 춤과 의상들은 비엔나 청중들에게 큰 흥미를 주었을 것이다. 개별무용의 안무가 실제로 각 나라의 전통적인 무용과 관련이 있는지, 만약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유사한지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발레의 한국적인 요소와 한국에 대한 오해

발레 “한국의 신부”는 당시 비엔나 사람들이 한국과 한국적인 요소를 어떻게 이해하고, 이를 사용하여 공연예술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보여준다. 먼저, 제 2막 ‘제물포항에서’는 조선 후기 개항했고, 현재는 인천으로 불리는 제물포, 즉 실제 한국의 지명을 배경으로 한다. 제 2막 ‘아편굴에서’ ‘하우스-게오스코프’라는 남자가 등장하는데, 이는 동아시아의 전통 중 하나인 풍수(지리)가를 뜻한다고 생각된다. 또한 ‘하우스-게오스코프’는 아마도 ‘호로스코프’를 도구로 사용하는 서양의 점성술가와 대비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의 신부”에는 왕자와 신하들의 궁중의상 뿐 아니라, 한국의 평민 의상, 군복 등 한국과 동아시아 나라들(중국과 일본)의 다양한 의상을 선보였다. 1897년 공연 당시에는 총 300개 이상의 의상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로부터 발레의 화려하고 성대한 규모를 추측할 수 있다.(3) 하지만 이 의상들은 당시 언론에서 ‘일본과 중국의 의상’이라고 소개되었다.(4) 여기에 예상되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제작팀이 한국의 실제 전통의상을 구하거나 재현할 수 없었거나, 아니면 1890년대 후반 비엔나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몰랐을 것이다. 

이 발레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잘못 해석된 부분들이 나온다.  “중국 교외의 서울”이라는 표현과 ‘한국군을 이끄는 중국 장군’과 같은 장면 묘사는 레겔이 한국을 중국에 속한 나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여주인공과 그녀의 아버지는 한국인이지만, 다이샤와 리타미라는 일본식 이름을 가진다. 또한 제 2막 ‘아편굴에서’ 등장하는 ‘아편굴의 프리마’는 당시 프로그램북에 ‘가이샤’라고 언급되는데, 이는 일본 기생인 게이샤를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바이어의 음악에는 한국(또는 동아시아적인) 악기가 편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전통리듬(장단)이나 전통음계 등 세부적인 한국 음악적 요소도 거의 찾을 수 없다. 바이어는 전쟁장면을 반복되는 트럼펫의 전쟁신호, 4분의 2박자의 전쟁 춤, 어두운 단조 분위기의 패시지 등 다양한 방식으로 묘사했다. 바이어의 다른 발레 작품들과 비교하여 추측하건데, “한국의 신부”에 있는 몇몇 멜로디는 당시 비엔나 청중들의 귀에 ‘이국적’으로 들릴 수 있겠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제 1막 왕의 신하인 리타미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먼저 완전5도 도약 이후, 단2도, 증2도, 단2도로 하행하는 당김음의 다소 이국적인 선율이 연주된다 (A, e, d#, c, b). 이에 뒤따르는 왕자의 등장에서는 장3화음 2분음표가 리타미의 선율 아래에 추가된다. 이것은 마치 왕자의 품위 있는 느린 발걸음을 연상시킨다. 제 3막 ‘일본군 진영’과 ‘전투 장면’에서는 4분의 2박자의 라단조와 다단조 음악이 울리며 어둡고 경직된 분위기가 가득한 전쟁 분위기를 만든다. 사랑이나 기쁨을 그리는 다른 부분은 귀엽고 부드러운 선율에 우아한 반주가 흐르는 전형적인 비엔나 왈츠 풍으로 구성된다.

발레의 중단

발레 “한국의 신부”는 “옛 형식의 발레픽션과 현대적인 발레리얼리즘을 결합”한 시도로서 당시 언론에게 극찬을 받았다.(5) 하지만 1901년 5월 2일 마지막으로 비엔나 발레 무대에서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그라프 고루숍스키 (Graf Goluchowski)의 명령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여진다. 1901년 4월 14일 비엔나에서 독일왕자 대관식을 기념하기위해 발레 “한국의 신부”가 공연되었고, 고루숍스키도 참석했다. 1933년, 고루숍스키가 죽고 12년 후에서야 레겔은 이 사건을 잡지 “무대(Die Bühne)”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장관은 발레의 일본 승리축제가 동쪽 이웃과[러시아](6) 간헐적인 동맹국들에 시위를 쉽게 일으킬 수 있다는 의견이었다. 일본 승리축제 장면은 그가 높은 직위에서 발레 제거를 요구하도록 촉발시켰다. 그래서 이 외교관이 예외적으로 - 대부분 외교관들은 발레에 적대적이지 않으나 - 발레의 명맥을 끊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7)

고루숍스키는 ‘일본 승리축제’ 장면을 발레 전체 줄거리의 전후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채 표면적으로 이해했다.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발레에서 ‘일본 승리축제’는 단지 지나가는 장면 중 하나일 뿐이다. 제 3막 ‘일본군 진영’에서는 일본군들이 전쟁 영웅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왕자와 신부를 위험에 빠뜨리는 악당처럼 표현된다. 

인기 있던 발레의 명맥이 한 정치인의 명령으로 끊어지고야 말았다! 그 배경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특정한 정책이 있었는지는 사가들의 연구를 기다릴 수 밖에 없다. 예술과 정치의 분리는 오늘날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그 당시에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100년 이상 잠들었던 “한국의 신부” 총보가 우리 손에 쥐어졌다. 이제 비엔나 무대에 발레 “한국의 신부”가 다시 오를 일만 남았다. 이 발레의 재현을 넘어 현대적인 새로운 연출을 기대해본다.

 

(1) “Die Braut von Korea Ballett – Besetzung”(22.05.1897), https://archiv.wiener-staatsoper.at/performances/54019, 08.03.2021 접속.
(2)  “Theater Kunst und Literatur”, Neus Wiener Tagblatt, 23.5.1897, https://anno.onb.ac.at/cgi-content/annoshow?call=nwg|18970523|8|100.0|0, 3.2.2021 접속.
(3) Vgl. Hee Seok Park, Die Braut von Korea. Ballett in vier Akten und neunBildern von H. Regel und J. Hassreiter. Musik von Josef Bayer Neuherausgegeben und kommentiert von Hee Seok Park, Berlin 2014, S. 35.
(4) “Theater und Kunstnachrichten”, Neue Freie Presse, 13.11.1897, https://anno.onb.ac.at/cgi-content/annoshow?call=nfp|18971113|8|100.0|0, 3.3.2021 접속.
(5)  Neus Wiener Tagblatt, 23.5.1897.
(6)  저자 주.
(7)  Heinrich Regel, »Aus der Glanzzeit des Wiener Balletts«, in: Die Bühne, Heft 349 (1933), S. 54,  https://anno.onb.ac.at/cgi-content/annoshow-plus?call=bue|1933|0349|00000056||jpg||O|, 3.2.2021 접속.

 

 

필자는 2020년 6월 이 발레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쇼트 출판사에서 바이어의 육필총보 악보를 대여했는데, 아직 외부로 반출된 적이 없어서 제본을 새로 해서 보내주셨다. 2020년 가을, 문헌 조사를 하던 중 Die Braut von Korea의 공연이 중단될 수 밖에 없었던 '직접적인 이유'로 추정되는 Regel의 회고문을 발견했다(위 글에서 인용된 고루숍스키 명령건). - 매우 가슴이 뛰는 순간이었다! 음악학 연구를 위해선 악보의 현대화가 우선이라는 생각이었다. 필자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 비엔나 한국대사관 문화홍보관 유튜브에서 녹음한 음악 일부를 접했고, 총보 현대화 작업도 거의 마무리 되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2021년 3월 2일 Die Braut von Korea의 총보와 피아노 파트보를 비엔나 한국대사관 윤종석 문화홍보관님으로부터 제공받았다. 이 글은 2021년 3월 4일에 비엔나 한국문화원의 요청으로 작성을 시작했으며 3월 25일 탈고했다. 이 글은 먼저 독일어로 작성 후 필자가 한국어로 번역했다. 자료를 제공해주시고 연구를 제안해주신 윤종석 홍보관님과 비엔나 한국대사관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어 글 최종 교정에 도움을 주신 안종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2021년 3월 25일 (최종)